[지혜의 아침―양미강] 노년을 즐기려면
주디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나설 채비가 한창이다. 칠십대의 나이지만 그동안 짬짬이 수영을 다니면서 닦아놓은 체력이 젊은 사람 부럽지 않다.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간단한 토스트로 식사를 해결한 그는 일터로 나선다. 그의 일터는 그가 다니는 둘린교회에서 지역선교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학교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학교에서 일주일에 세번씩 코디네이터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말이 코디네이터지, 실제로는 복사하기, 커피 준비하기, 상담하기 등 온갖 잡무를 다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일하는 것이 즐겁다.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30여명. 모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자원봉사자들이다. 4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강의를 준비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 강의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활을 공유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자원봉사를 한다고 해서 이들의 가르치는 실력을 무시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이들은 영어를 가르치는 데 있어 전문가들이다. 자원봉사를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교육을 받고, 오랫동안 팀티칭을 통해 선배 강사의 강의를 돕다가 주 강사로 활동하게 된다. 대부분 이들의 경력은 십수년이 넘는다. 그러니 타향살이에 지친 외국인들에게 입과 발이 되어주는 일은 자연스레 이들의 일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노인들의 자원봉사다. 지역 도서관을 가도, 지역 커뮤니티센터를 가도 언제나 노인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한다. 이들에게 자원봉사는 생활 속의 한 부분처럼 되어 있다. 많은 노인들이 한두 개의 자원봉사를 하면서 말년을 즐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아간다. 자원봉사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미국 노인들은 자신의 노후에 대한 고민과 준비를 젊을 때부터 해온 것같다. 또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초가 되어 있다. 이런 기반이 삶의 질을 높인다. 삶의 질은 경제적 수치를 떠나 기부를 통한 의미있는 인생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기부문화는 배울 만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익활동을 위해 부모와 함께 길거리에서 기부캠페인을 하는 아이들이 바로 노인이 되어서 자신의 시간과 지식을 기부하는 것이다.
인생을 즐기는 일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노인들은 인생 후반부를 즐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미래를 준비하는 일 자체가 사치였던 시대에 살았고, 이미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오늘날 한국노인의 자화상은 소비의 주체도, 생산의 주체도 아닌, ‘부담’의 주체이다. 아파트 노인정에서 화투로 소일하거나, 그것마저 여의치 못한 노인들은 공짜 지하철을 타고 종묘나 사직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실버산업은 갈수록 성업이지만, 정작 실버세대인 노인들은 더 이상 실버산업의 주체로 자리잡지 못하는 현실이다. 요즘 새롭게 등장하는 5060세대가 새로운 소비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APPLE(Active Pride Peace Luxury Economy)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인생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삶의 질은 인생의 후반부를 제대로 즐길 때 완성된다. 인생의 전반부를 ‘빨리빨리’ 철학으로 살아왔다 치더라도, 후반부는 ‘느릿느릿’하게 깊이를 즐기면서 삶의 지혜와 지식을 기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삶의 질이 아닐까?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즐기며 살지 고민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자. 이제부터라도 좀 폼나게, 그리고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돈과 시간, 그리고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그게 바로 행복이니 말이다. (워싱턴에서) 양미강(한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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