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야기]‘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설의 위기

우편배달이 중단된 데 항의하는 캐나다 주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어두우나, 정해진 구역을 도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세계 집배원의 모토처럼 돼 있는 이 문구는 기원전 500년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에 나오는 말이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안의 정비된 우편제도를 묘사하면서 날씨 변화에 상관없이 임무에 충실한 집배원을 그같이 표현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토라기보다 신화에 가까운 말이지만, 집배원의 직업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구로 널리 쓰인다.
미국 우정청은 연례보고서를 발간할 때마다 표지에 이 문구를 사용하며, 언론과 시민들도 우편배달 문제를 언급할 때 종종 이 문구를 인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 집 우편함을 자동차가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우편물을 배달해주지 않는데, 이러고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는 집배원 모토를 외칠 수 있는 건가요” 하며 인터넷에 항의 글을 올리는 식이다. 말하자면 우편서비스의 격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새해 들어 캐나다 우정공사가 더 이상 이 신화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전천후로 배달하는 것을 재고하겠다고 공개 천명한 것이다. 웬만한 캐나다 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국 언론에서 다투어 보도할 만큼 이 뉴스는 주목을 끌었다. 캐나다 우정공사가 홈페이지에 띄워놓은 사정 설명의 글을 보면 원인은 눈(雪)이다. 눈이 많이 오는 농촌마을에 배달하다가 퀘백주에서만 5400명의 집배원 중 400명이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는 등 위험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작업 안전을 보장하도록 돼 있는 노동법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는 게 우정공사 측 설명이다.
우정당국이 추진하는 대안은 농촌지역에 대한 배달 안전도 측정이다. 향후 5년간 전국 84만3000여 개에 달하는 농촌지역 우편함에 대해 하나 하나 배달 안전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제교통안전전문가에게 도로 사정, 교통량 등을 감안해 기준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기준을 개별 우편함에 적용해 안전에 이상이 있다고 나오는 곳은 배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구상이다.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소요 예산도 이미 475만~640만 달러 책정해놓았다.
캐나다 우정공사는 이 같은 장기적·제도적 접근 외에 단기적·일시적 처방도 함께 내놓았다. 집배원이 다니는 접근로에 눈을 치우지 않을 경우, 편지나 전화로 1차 경고하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배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 쯤 되면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농촌지역 주민들은 물론 도시민들도 우정공사가 지나치게 공급자 위주라고 비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캐나다 우정공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집배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집배원 노조의 목소리가 그만큼 큰 것이다. 사나운 개가 있다고, 진입로에 개똥이 많아 집배원이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고 서비스를 중단하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고양이가 여성 집배원을 무섭게 한 집에 대해 배달 중단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해당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집배원 안전만 중시하고 국민 편의는 외면하느냐는 볼멘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우정공사가 품은 많이 들고 돈은 안 되는 농촌지역 배달을 아예 하지 않을 속셈으로 안전도 조사 운운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또 연방정부는 우정공사에 농촌 배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국가가 직접 우정사업을 경영하지 않는다 해도 우정서비스는 모든 국민에게 차별없이 제공해야 하는 보편적 서비스인 것이다. 하지만 우정공사는 노동자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다. 헤로도투스가 누군지 몰라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를 당연한 임무로 생각하는 한국 집배원의 눈으로 보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선진국의 단면이다. 보편적 서비스를 민간에 맡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참고 사례로 캐나다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종탁<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출처 뉴스메이커







